제11편. 고구려 VS 당나라 전쟁 ②
제3장 안시성 전투
안시성 싸움 전 피차간의 교섭과 충돌
삼국사기에 기록된 고구려가 수(隋)와 당(唐)과 벌였던 두 차례의 전투에 대한 서술은, 사실상 수서(隋書)와 당서(唐書)의 내용을 발췌하여 정리한 기록에 지나지 않는다. 그러나 앞서 말했듯이, 이 두 전쟁에 관한 수서와 당서의 기술은 대부분 허위로 이루어진 면이 있다. 수서의 경우, 수나라가 이 전쟁 이후 곧 멸망하였고, 전투를 기록한 자가 당나라 사람이었기에 상대적으로 왜곡이 적다고 볼 수 있다. 반면, 당서는 당 왕조가 오랜 세월 지속되는 동안 고구려와의 전쟁 기록을 당나라 사관들이 작성하였기 때문에, 진위 여부를 뒤바꾸고 승패를 꾸며낸 사례가 많아 얼마나 사실과 거리감 있는지 명확히 알기 어렵다. 이제 신·구 당서, 자치통감, 책부원귀 등에 나타난 두 나라의 외교와 충돌의 과정을 개략적으로 정리한 후, 그 진위 여부를 가려내고 당시 상황을 논의하려고 한다.
첫째, 정관(貞觀) 17년 6월에 태상승(太常丞) 등소(鄧素)가 고구려에 사신으로 갔다가 돌아와, 회원진(懷遠鎭)에 수비병을 증원해 고구려를 압박할 것을 청하였다. 이에 태종은 “먼 곳의 사람들이 복종하지 않으면 문덕(文德)을 닦아 스스로 오게 해야 할 것이지, 1~2백 명의 수비병으로 멀리 떨어진 이들을 위압했다는 이야기는 들어보지 못하였다”라며 이를 반박하였다. 이는 등소가 고구려의 강성과 위세를 보고 두려움을 느껴 수비병 증강을 요청한 사실을 보여준다. 그러나 불과 몇백 명을 요청했다는 점은 과장되고 격하된 기술로서 실질적 상황과는 거리가 멀 것이 분명하다.
둘째, 윤 6월에 양제(煬帝)는 방현령(房玄齡)에게 "개소문이 임금을 시해하고 국정을 독단적으로 운영하니 참을 수 없는 일이다. 우리 병력으로 지금 공격한다면 어렵지 않게 정복할 수 있겠지만, 백성을 힘들게 하고 싶지 않으니 우선 글안[契丹]과 말갈(靺鞨)을 시켜 공격하도록 하려 한다. 어떻게 생각하는가?"라고 말했다고 한다. 여기서 말갈은 곧 예(濊)로, 이미 수백 년 전부터 고구려에 귀속된 상태였다. 글안 또한 장수왕 시대 이후 고구려의 영향권에 있었다. 따라서 당태종이 예와 글안을 동원해 고구려를 공격하겠다는 발상이 현실적일 수 없으며, 그가 아무리 잘못된 판단을 내렸다 해도 이처럼 비현실적인 발언까지는 하지 않았을 것이다. 이는 대체로 사관의 주관적 왜곡에 따른 잘못된 기록일 가능성이 크다.
셋째, "어떤 사람이 황제에게 고려를 치자고 권하였으나, 황제는 상중이라 하여 이를 실행하지 않았다"는 기록은 당태종이 연개소문이 군주를 참살한 일을 치죄하려 했다면, 춘추대의의 기준에서도 상중이라 해도 공격이 정당했을 텐데, 도리어 상중을 이유로 침공을 미뤘다는 점에서 논리적 모순으로 보인다. 이는 당시 당태종이 아직 대고구려 침략 방책을 정하지 못해 전쟁을 미룬 것으로, 사관의 평가는 부적절하다.
넷째, 신라가 사신을 보내 "고려와 백제가 동맹하여 신라를 치려 한다"고 하자 당태종은 사농승 상리현장을 파견해 고구려 왕에게 "신라는 우리에 귀속된 나라니 너희와 백제는 군사를 거두라. 만약 다시 공격하면 내년에 군사를 일으켜 너희를 정벌하겠다"고 경고했다. 이듬해 정월, 현장이 평양에 도착했을 때 고구려 측은 이미 신라를 공격해 두 성을 함락시킨 상태였다. 현장의 요청으로 고구려 왕이 연개소문을 소환해 신라 공격 중지를 요청했으나, 연개소문은 "예전에 수나라가 우리를 침입했을 때 신라가 허점을 타 우리 영토 500리를 빼앗았다. 우리가 신라를 치는 것은 본래 잃은 땅을 되찾기 위한 일이니, 침략이라 할 수 없다. 다만 전쟁 준비가 완벽히 갖춰지지 않아 실천하지 못했을 뿐"이라 답했다고 전한다.
그러나 상리현장이 그러한 거만한 국서를 들고 갔다면, 후일 장엄처럼 체포되었을 가능성이 크다. 또한, 연개소문이 신라 원정을 진행 중이었다면 어찌 당 사신의 요청으로 소환될 수 있었겠는가? 게다가 신라 본기의 기록에는 수나라 침략 시 신라가 고구려 영토 500리를 빼앗은 사실도, 연개소문이 두 성을 점령했다는 내용도 없다. 이는 당태종이 현장의 사신 임무를 핑계 삼아 출병 명분을 조작했음을 여실히 증명한다.
다섯째, 황제가 고구려를 공격하려 하며 고구려를 속일 사자를 모집했으나, 사람들은 이를 꺼려 나서지 않았다. 이때 장엄은 나서서 "천자의 위엄과 무력이 사방을 두렵게 하고 있는 이 상황에서, 어느 나라가 감히 황제의 명을 전달하러 간 이를 해치겠는가? 만약 불행한 일이 생겨난다면, 그것은 바로 내가 죽어야 할 자리일 것이다"라고 말하며 자진해서 그 역할을 맡겠다고 청했다. 결국 그는 스스로 나서 사자 역할을 하여 고구려로 향했지만, 막리지에 의해 억류되었다. 장엄이 어떤 사명을 띠고 갔는지는 역사에 명확히 기록되지 않았으나, 그 이전에 이미 당나라 사신이 연개소문에게 붙잡혀 죽음을 맞이한 일이 없었다면, 어찌하여 당의 사신들이 모두 출발 자체를 꺼리게 되었겠는가? 이러한 사실로 미루어 보아, 당나라의 사관들이 해당 사건과 관련된 치욕을 감추기 위해 교섭의 구체적인 경위를 상당 부분 기록에서 삭제했음을 짐작할 수 있다.
고구려와 당은 서로의 강약을 겨루며 양립할 수 없는 관계였고, 연개소문과 당태종 역시 서로를 넘어서려는 야망으로 맞섰다. 이러한 두 인물이 각각 고구려와 당의 정권을 장악하게 되었으니, 두 나라 간 전쟁의 발발은 필연적인 일이었다. 만약 연개소문이 권력을 장악한 시점이 몇 해 정도 앞섰더라면, 당태종이 동방 원정을 나서기 이전에 연개소문이 서방 원정을 감행했을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당시 상황은 달리 흘렀다. 당태종은 중국을 통일한 지 30년, 제왕으로서 나라를 재정비한 지 20년, 돌궐과 토곡혼 등을 정복한 지 10년이 지난 후에야 연개소문은 혁명에 성공하고 고구려의 실권을 쥘 수 있었다. 이 때문에 당태종이 먼저 군사를 일으켜 침입하는 결과를 낳았다.
연개소문으로서는 고구려 내부의 정비와 외교적 과제를 모두 마무리한 뒤에야 전쟁을 준비하고 싶었겠지만, 상황은 이를 허락하지 않았다. 그는 서둘러 남쪽으로는 백제와 동맹을 맺고, 서북쪽으로는 설연타 등을 선동해 동조 세력을 형성하는 데 그칠 수밖에 없었다. 한편, 당태종 또한 과거 수나라 양제가 고구려를 상대로 한 전쟁 실패로 멸망했던 교훈을 뼈아프게 새겼지만, 동시에 전쟁을 피할 수 없는 현실임을 자각하고 있었다. 그는 연개소문의 권력 기반이 완전히 굳어지기 전에 이를 억누르기 위해 신속히 군대를 동원했던 것이다.
이것이 당시 고구려와 당 양측의 정치적·군사적 형세였다. 이에 비해 상대국의 역사가 춘추필법적인 서술로 왜곡된 기록이거나, 우리 역사가 자학적으로 편향된 관점을 담은 묘사는 모두 진실을 가리는 허황된 주장에 불과하다.
- 당태종의 전략과 침입 노선
당 태종의 고구려 원정은 단순히 하루아침에 이루어진 일이 아니라, 약 20년에 걸쳐 준비된 대규모 계획이었다. 진(秦)과 한(漢) 이후 흉노가 쇠퇴하고, 위(魏)와 진(晋) 이후 오호 민족도 중국 땅에 흩어져 공존했으며, 돌궐과 토곡혼 같은 세력도 간혹 중국의 서북에서 나타났지만 오래가지 못하고 약화되었다. 그러나 오직 고구려만은 동남과 동북 지역에서 중국과 대립하며 고유의 강력한 문화를 형성해나갔다. 척발씨의 주(周)나라를 견제하고, 수나라에 이르러서는 양제의 수백만 대군을 무너뜨려 주변국을 놀라게 한 동시에, 중국과 맞서며 독자적인 문화와 국풍을 발전시켰다. 신라의 협력 아래 형성된 이두 문자, 시문 창작, 음악과 미술 등에서도 독창성을 뽐내며 정치적으로나 문화적으로 강대한 제국으로 자리 잡았다.
이러한 상황에서 당 태종은 고구려와 같은 강력한 존재를 경계하지 않을 수 없었다. 정관 연간 동안 태종은 겉으로는 태평을 누리며 신하들과 함께 정치와 도덕을 논하는 모습을 보였으나, 내면에서는 유능한 모신 방현령조차 눈치채지 못할 만큼 고구려 원정에 대한 치밀한 계획을 품고 있었다. 그는 수나라 양제가 패배했던 원인을 철저히 분석하고, 자신의 전략이 그와 다르게 설계되어야 한다고 판단했다. 이에 따라 다음과 같은 네 가지 주요 전략을 구상했다.
1) 첫째로, 수나라 양제의 실패는 병사들의 자질을 가리지 않고 대규모 동원에 집중한 것 때문이라고 보았다. 비록 수 백만의 군사를 모았지만, 실질적으로 전투에 뛰어들 만한 병사는 많지 않았다. 이를 보완하기 위해 10년 동안 양성해 온 군대에서 특히 뛰어난 정예 병사 20만 명만을 선발하여 작전에 투입하고자 했다.
2) 둘째로, 수나라 양제는 고구려의 변경 지역을 단계적으로 잠식하지 않고 곧바로 대규모 병력을 평양으로 밀어붙인 전략적 실수를 범했다는 점에 주목했다. 그 결과 보급로가 끊기고 후방 지원군도 없었다. 이에 태종은 평양 침공 대신 요동 지역의 고을들을 우선적으로 정복하며 차근차근 진격할 계획을 세웠다.
3) 셋째로, 수나라 군대는 군량 문제를 효과적으로 해결하지 못한 점이 패인의 주요 요소였다. 병사들은 자신의 식량을 직접 짊어지고 다녔고, 별도로 운송된 군량은 고구려 수군에게 격침되어 대부분 상실됐다. 태종은 이를 보완하기 위해 국가 차원에서 소, 말, 양 등을 체계적으로 길러 전쟁에 지원토록 했다. 병사들에게는 말을 타고 다닐 수 있도록 하고, 양식은 주로 소를 통해 운송하게 하여 병사가 직접 짐을 짊어질 필요가 없도록 했다. 또한 도착 후에는 기다리지 않고도 충분한 보급이 이뤄지도록 만들고, 경우에 따라 전장에서 가축의 고기를 이용해 식량 문제를 해결하려 했다.
4) 마지막으로, 수나라가 패배한 또 다른 큰 이유는 외국의 지원 없이 단독으로 고구려와 싸우며 외교적 지렛대를 활용하지 못한 점이었다. 태종은 신라 김춘추의 도움 요청을 받아들이며 공수 동맹을 체결하고, 신라를 활용해 고구려 후방을 교란시키려 했다.
이러한 사전 준비와 치밀한 전략은 당 태종의 강한 집념과 세심한 계획성을 잘 보여준다. 동시에, 고구려 침공이 단순한 군사 작전에 그치지 않고 철저히 계산된 정치적·전략적 도박임을 나타낸다.
이와 같은 계획을 신중히 마련한 뒤, 644년 7월에는 각 군대를 낙양(洛陽)에 집결시키고 군량은 영주(營州)의 대인성(大人城, 현재의 진황도)에 모았다. 영주도독 장검에게는 유주와 영주의 군사를 이끌고 요동 인근을 정찰하며 고구려의 형세를 탐지하도록 명령했다. 또한 장작대장 염입덕에게는 군량을 대인성으로 운송하는 임무를 맡겼다.
그해 10월, 당 태종은 형부상서 장량을 평안도 행군대총관으로 임명하고, 상하와 좌난당은 부총관으로 삼았다. 아울러 방효태, 정명진, 염인덕, 유영행, 장문간을 총관으로 지정해 강, 회, 영, 협 지역의 정예병 4만 명과 장안 및 낙양에서 차출한 용사 3천 명과 함께 출발시켰다. 표면적으로는 평양을 목표로 한다고 하였으나, 실제로는 요하를 향하게 했다.
이와 동시에, 이적을 요동도 행군대총관으로 임명하고 강하왕 왕도종을 부총관으로 지정하였다. 장사귀, 장검, 집실사력, 계필하력, 아사나미사, 강덕본, 오흑달 등을 총관으로 삼아 육로를 따라 요동으로 향하게 했다. 이 두 군대는 요동에서 합류하며, 당 태종은 직접 20만 군사를 이끌고 후방에서 지원하기로 계획했던 것이다.
- 연개소문의 방어 및 공격 전략
당나라 군대가 침략해온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연개소문은 여러 장수들을 소집하여 대처 방안을 논의했다. 일부는 평원왕 시대의 온달이 주나라와 싸운 사례를 들며 기병으로 적을 격파하고 요동 평야에서 결전을 벌이는 것이 옳다고 주장했다. 다른 이들은 영양왕 시대 을지문덕이 수나라를 상대했던 방식처럼, 마을 주민과 곡식을 성으로 옮겨 방어하고, 적을 평양성으로 끌어들인 뒤 보급로를 차단해 지치고 굶주린 틈을 타 공격하자고 제안했다. 이에 의견이 나뉘어 분분한 논쟁이 벌어졌다.
연개소문은 말했다. “전략은 그때그때의 형세에 맞게 결정해야 합니다. 지금의 상황은 평원왕이나 영양왕 시대와는 다릅니다. 과거의 사례를 그대로 적용하는 것은 옳지 않습니다. 지금은 적절한 위치에서 방어하다 기회를 엿보아 공격해야 할 시점입니다.”
그는 곧 명령을 내려 건안, 안시, 가시, 횡악 등의 주요 성읍만 철저히 방어하도록 하고, 나머지 지역의 곡식과 사료는 일부를 옮기고 나머지는 모두 불태워 적이 약탈할 수 없게 만들었다. 이어 연산관으로 알려진 오골성을 방어선으로 삼아 용맹한 장수와 군사를 배치하고, 안시성주 양만춘과 오골성주 추정국에게 비밀리에 당부했다.
"지금 당나라 군대는 수나라의 패배를 거울삼아 군량 문제에 각별히 신경 쓰고 있습니다. 따라서 장기간의 보급난을 대비해 수많은 소와 말, 양 같은 가축을 끌고 왔습니다. 그러나 가을이 지나고 겨울이 되면 풀도 마르고 강물마저 얼어붙을 테니 그들조차 먹이를 찾기 힘들게 될 것입니다. 저들도 이를 우려해 조속히 결판을 내려 하겠지만, 수나라 패배의 교훈을 잊지 않고 평양으로 바로 진격하지 않을 것입니다. 대신 안시성을 먼저 공격할 것이니, 양공께서는 성 밖으로 나가지 말고 굳게 방어하다가 적이 지치고 굶주릴 때를 기다리십시오. 그 시점에 양공은 성 안에서 공격하고, 추공은 성 밖에서 진격하십시오. 저는 후방에서 당군의 퇴로를 차단하고 그들을 포위하여, 마침내 이세민을 사로잡아 결전을 끝낼 것입니다."
- 상곡(上谷)의 횃불과 당 태종의 패주(敗走)
해상잡록(海上雜錄)에는 다음과 같은 기록이 전해진다. 당 태종이 출정에 앞서 당대 최고의 명장으로 꼽히는 이정(李靖)을 행군대총관(行軍大總管)으로 임명하려 하자, 이정은 이를 정중히 사양하면서 이렇게 말했다. “폐하의 은혜도 무겁거니와, 제게 큰 가르침을 주신 스승의 은혜 또한 저버릴 수 없습니다. 제가 젊은 시절 태원(太原)에 머무를 때 연개소문을 만나 병법을 배웠고, 그 후 폐하를 돕고 천하를 평정할 수 있었던 것은 모두 그의 병법 덕분이었습니다. 그런데 이제 제가 어찌 과거 스승으로 모셨던 연개소문을 감히 칠 수 있겠습니까?” 그러자 태종이 다시 물었다. “개소문의 병법이 과연 옛사람 누구와 비교할만한 수준이란 말인가?” 이에 이정은 답했다. “옛사람들과 비교하기는 어렵지만, 오늘날 폐하의 많은 장수 가운데 그의 적수가 될 자는 없습니다. 비록 천자의 위엄으로 맞선다 한들 승리를 장담하기 어려울 수도 있습니다.” 이 말을 듣고 태종은 불쾌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중국처럼 넓은 땅과 수많은 백성, 강력한 군대를 지닌 우리가 어찌 한낱 연개소문을 두려워해야 한단 말인가?” 이에 이정은 재차 말했다. “연개소문은 비록 한 사람일 뿐이지만, 그의 재주와 지혜는 웬만한 만인(萬人)을 뛰어넘습니다. 그렇다면 두려워하지 않을 도리가 없습니다.” 이 기록이 사실이라면, 당 태종은 누이동생과 관련된 이유로 연개소문을 제거하지 못했던 과거를 후회했을 것이다.
645년 2월, 당 태종은 낙양(洛陽)에 도착해 과거 수나라의 우무후장군(右武候將軍)으로 양제(煬帝)를 따라 살수(薩水)의 전투에 참전했던 인물인 정원도(鄭元道)를 불러 고구려 상황에 대해 물었다. 수나라가 망한 뒤, 선주자사(宣州刺史)를 지내다 은퇴한 정원도는 노년의 나이였으나 당시 경험을 바탕으로 이렇게 답했다. “요동은 거리가 멀고 보급 문제 때문에 식량 운반이 어렵습니다. 게다가 고구려는 성을 잘 방어하는 나라라, 성을 함락시키기란 극히 어렵습니다. 이번 원정은 매우 위험해 보입니다.” 당 태종은 그의 말을 듣고 크게 기뻐하지 않으며 말했다. “지금의 우리 국력이 과거 수나라와는 비교조차 되지 않으니 공은 결과만 지켜보시오.” 하지만 태종은 혹시 모를 상황에 대비해 태자와 이정에게 후방 수비를 철저히 맡기도록 명령하고 마침내 군대를 출발시켰다.
군대가 요택(遼澤, 지금의 발해 지역)에 도달하니, 약 200리의 진흙 늪지대가 펼쳐져 있어 사람과 말이 도저히 지나갈 수 없었다. 이에 태종은 장작대장 염입덕(閻立德)에게 명령해 나무와 돌을 가져와 길을 만들게 했다. 작업 도중, 이곳에서는 수나라 때 전투에 희생된 병사들의 해골이 곳곳에 널려 있었다. 태종은 제문(祭文)을 지어 제사를 올리며 눈물을 흘렸고 신하들을 향해 말했다. “오늘날 중국의 젊은이들 대부분은 바로 이 해골들의 후손들일 터이니, 어찌 이들에게 복수를 하지 않을 수 있겠소?” 이후 태종은 요택을 지나며 건방진 듯 이렇게 말했다. “누가 연개소문더러 병법에 능하다 했느냐? 병법을 안다면 어찌 이러한 요택과 같은 지형적 요충지를 지키지 않는단 말인가?”
요하를 건넌 이후 전투는 순조롭게 진행되어 요동 지역의 주요 성들인 오열홀, 백암, 개평, 횡악, 은산, 그리고 후황성 등을 차례로 함락시켰다. 이후 당군은 다음 작전을 논의하기 위해 이적 등 여러 장수들과 회의를 열었다. 이 자리에서 강하왕 도종은 오골성을 점령한 만큼 즉시 평양으로 진격하자고 제안했으나, 이적과 장손무기는 안시성을 공격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수나라가 과거 우문술을 비롯한 30만 대군을 이끌고 평양을 공격했다가 참패했던 사례를 경계하던 당태종은 도종의 의견을 채택하지 않고, 이적의 제안에 따라 안시성을 공략하기로 결정했다.
한편, 연개소문은 요동 방어를 안시성주 양만춘과 오골성주 추정국에게 맡긴 상황이었다. 안시성은 '아리티', '환도성', 혹은 '북평양' 등으로 불렸으며, 고구려 태조왕 시기에 서부 지역 방어를 위해 축조된 중요한 성이었다. 발기 난으로 인해 한때 점령당하기도 했으나, 고국양왕이 이를 회복한 이후 전략적 요충지로 각광받아 더욱 견고하게 보강되었으며, 다수의 정병과 수십만 섬의 양식이 상시 비축되어 있었다. 오랜 세월 동안 안시성은 난공불락의 요새로 알려져 왔다.
당태종은 같은 해 6월, 이적과 함께 수십만 대군을 이끌고 안시성을 겹겹이 포위했다. 그는 성 안에 대고 항복하지 않으면 모두 죽음을 면치 못할 것이라고 협박했으나, 이에 맞서 양만춘은 성벽 위에서 당군에게 항복하지 않으면 성 밖으로 나가는 날 너희를 모두 전멸시키겠다고 응수했다. 당군이 공격해 올 때마다 성 안의 군사들은 정확한 화살로 적을 저격해 큰 피해를 입혔다. 당태종은 결국 포위 전략으로 성을 고립시키고 굶주리게 하려 했으나, 성 안에는 충분한 식량이 비축되어 있었던 반면 당군의 양식은 몇 달이 지나면서 점차 고갈되었다. 요동에서 얻은 몇 개의 성도 비축물자가 거의 없는 빈 성들이었으며, 수군마저 고구려 해군에 의해 차단돼 보급로 확보가 어려웠다. 더불어 날씨가 급격히 추워지는 요동 지역 특성상 가을 바람이 불면 초목이 말라 소와 말 같은 군용 가축들이 굶주릴 위기에 처했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당태종은 다급히 강하왕 도종에게 명령하여 안시성 동남쪽에 토산을 쌓도록 지시했다. 흙과 나뭇가지를 겹겹이 쌓아올린 토산은 중간에 다섯 갈래 길을 만들어 군사들이 오갈 수 있도록 했고, 이 공사에는 10일 동안 막대한 비용과 인력, 군사 수만 명이 동원되었다. 작업 중에도 군사 간 교전이 빈번하게 일어났으며 이 과정에서 많은 사상자가 발생했다. 토산이 완성되자 당군은 산 위에서 돌팔매기 구와 파괴용 차량을 이용해 성벽을 무너뜨리기 시작했지만, 안시성 군사들은 무너진 부분을 목책으로 방어하며 필사적으로 저항했다. 그러나 점차 힘에 부치게 되자 양만춘은 결사대 백 명을 선발해 기습적으로 난입하면서 당군을 후퇴시켰다. 이들은 토산을 장악한 후 당의 무기들을 확보하고 이를 앞세워 다시 당군을 공격하면서 전황을 뒤집었다.
결국 계책이 막힌 당태종은 더 이상 버티지 못하고 퇴각을 결정할 수밖에 없었다.
연개소문은 요동의 전투를 양만춘과 추정국 두 장수에게 맡기고, 정병 3만을 이끌고 적봉진(지금의 열하 부근)으로 진격했다. 이후 그는 남쪽으로 진로를 돌려 장성을 넘어 상곡(지금의 하간 지역)을 기습 공격했다. 이로 인해 당의 태자 이치가 어양에 머물다 크게 놀랐고, 급히 봉화를 올려 상황을 알렸다. 봉화는 하룻밤 사이 안시성까지 전달되었으며, 이를 통해 당태종은 변란이 발생했음을 알아차리고 군사를 철수하려 했다.
한편, 오골성주 추정국과 안시성주 양만춘은 봉화를 통해 연개소문이 자신의 위치에 도달했음을 확인했고, 당태종이 도망칠 가능성을 예측했다. 추정국은 전군을 이끌고 안시성 동남쪽 협곡으로 나와 당군을 기습했고, 양만춘은 성문을 열고 공격에 나섰다. 이 돌격으로 당군은 심각하게 혼란에 빠졌으며, 군사와 말이 서로 짓밟히며 궤멸적인 패배를 겪었다.
당태종은 헌우란까지 도주했으나, 그 과정에서 말이 수렁에 빠져 움직이지 못했다. 이 틈을 타 양만춘이 쏜 화살이 그의 왼쪽 눈에 맞았고, 거의 생포될 뻔했다. 그러나 당의 용장 설인귀가 재빨리 태종을 구하며 말을 갈아 태우고, 전군 선봉 유홍기가 뒤를 막아 혈전을 벌인 끝에 당태종은 간신히 목숨을 건졌다. 현지에는 지금도 ‘당태종의 말이 빠진 곳’이라는 이야기가 전해 내려오며, 이와 관련된 전설이 사람들 사이에서 구전되고 있다.
양만춘 등의 고구려군은 당태종을 요수까지 추격해 다수의 당 장수를 베거나 포로로 잡았으며, 요택 근처에서는 당태종이 말을 수렁에 빠뜨려 다리 삼아 건너는 수모를 겪었다. 이후 10월에 임유관에 도달했을 때, 연개소문은 당군의 퇴로를 차단했으며, 양만춘도 계속해서 강력히 추격했다. 상황이 절망적으로 치닫던 중 갑작스런 눈바람이 천지를 휩싸며 시야를 가렸고, 양군 모두 패닉 상태에 빠졌다. 이 틈을 타 당태종은 간신히 혼란 속에서 몸을 피해 고국으로 돌아갈 수 있었다.
안시성 전투는 동양 고대사에서 중요한 전쟁으로, 비록 병력 규모는 살수대첩에 미치지 못했으나 전술의 치밀함, 군대의 정예도, 물자의 소모 등에서 살수대첩을 능가했다. 또한, 전투 기간도 살수대첩에 비해 두 배 이상 길었다. 이 전투는 두 민족의 운명을 결정짓는 중요한 전쟁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당나라 사서의 기록은 여러 가지로 사실과 어긋나는 점이 많다.
첫째, 백제는 고구려의 동맹국이었음에도 당나라 사서에는 "백제가 검게 옻칠한 갑옷(금휴개)을 바쳐 당군이 이를 입고 출전하니 갑옷이 햇빛에 빛났다"고 기록되어 있다. 이는 고구려의 동맹국인 백제가 적국인 당나라 군대에 군사 장비를 제공했다는 내용이어서 상식적으로 납득하기 어렵다.
둘째, 당나라 군대의 패배 원인은 식량 부족에 있었다. 그러나 당나라 역사에는 당태종이 백암성을 함락시키며 10만 섬 혹은 50만 섬의 양식을 확보했다고 기록돼 있다. 그렇다면 당군은 운반해 온 식량 외에도 상당한 양의 추가 식량을 손에 넣은 셈인데, 이는 상반된 기록으로 보인다.
셋째, 연개소문은 영류왕과 다수의 호족을 제거하고 자신의 세력을 기반으로 관직을 재편하며 벌족정치를 타파했다. 그런데 당나라 역사에서는 "당태종이 안시성에 도달하니, 북부누살 고연수와 남부욕살 고혜진이 고구려와 말갈의 군사 15만 6천8백 명을 이끌고 안시성을 구원하였다"고 기록되어 있다. 이는 왕족인 고씨 가문이 여전히 남북 두 부를 기반으로 사령관 역할을 맡고 있었다는 뜻인데, 연개소문의 혁명 이후 이런 상황이 가능했을지 의문이다.
넷째, 안시성은 고구려 삼경 중 하나로 해상과 육상의 요충지였다. 연개소문이 혁명을 일으킨 뒤 이런 중요한 지역을 다른 세력에게 맡겼을 리 없다. 그러나 당나라 사서에서는 "안시성주(양만춘)가 재능과 용기가 뛰어나고 성의 방벽이 험준하며 양식도 풍부했기에 연개소문의 난 속에서도 성을 지키며 항복하지 않았다. 이로 인해 연개소문이 그 성을 맡겼다"고 기록하고 있다. 그렇다면 고구려가 여러 세력으로 분열되어 있었던 셈인데, 그런 상황에서 어떻게 하나로 단결해 수십만의 당군을 막아낼 수 있었겠는가?
또한, 평양 공격은 수양제가 실패로 끝낸 작전 계획이었다. 하지만 당나라 역사에는 "이정이 이 계책을 채택하지 않은 것을 패전의 주요 원인으로 보고, 당태종도 이를 후회했다"고 기록되어 있다. 이는 당시 수양제의 실패를 잊고 있는 것이 아닌가 싶다.
이처럼 당나라 사서에는 사실과 모순되는 기록들이 다수 포함되어 있는데, 이는 과연 무엇 때문인지 의문을 남긴다.
대체로 그 이유는 다음과 같다.
첫째, 모든 주변 나라를 당나라의 속국으로 여기는 주관적 자존심에 사로잡혀, 사관들이 높은 인물을 위해 숨기고 친한 사람을 위해 숨기며, 또한 중국 중심의 역사관인 이른바 춘추필법으로 기록했기 때문이다. 결과적으로, 이는 백제가 고구려의 동맹국임에도 불구하고 사실을 왜곡하여 첫 번째 항목에서 잘못된 주장을 하게 만들었다.
둘째, 요동성이나 개평성 등을 잇달아 점령하도록 한 것이 연개소문의 전략에 따른 것임을 가리기 위해 전리품의 양을 과장했고, 이를 통해 두 번째 항목에서 허위 증언에 해당하는 기록을 남기게 되었다.
셋째, 당태종이 패배하고 달아난 사실을 승리로 포장하려다 보니, 이미 고구려 고씨(高氏)의 천하가 연씨(淵氏)로 넘어간 상황을 망각하고, 15만 대군을 거느린 고연수와 고혜진 두 장수가 투항했다는 허위 조작을 세 번째 항목에 추가하게 된 것이다.
넷째, 수십만 대군을 동원하고도 몇 달 동안 안시성이라는 고립된 성 하나를 함락하지 못한 수치를 감추기 위해 "안시성을 당태종이 함락시키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 고구려 내부 권력을 쥔 연개소문조차도 해결하지 못했다"는 네 번째 항목의 기록을 남겼다.
다섯째, 당나라가 고구려에 패배한 원인을 계책 부족이나 인력 부족 때문이 아니라 tactics 부족으로 돌리며, "이도종(李道宗, 강하왕)이 평양의 허점을 공략하자고 제안했다"는 어이없는 다섯 번째 항목이 작성된 것이다.
위에 언급한 내용은 대략적인 사례들에 불과하며, 이를 더 면밀히 살펴보면 거의 대부분 같은 맥락으로 이루어진 것을 알 수 있다. 따라서 우리는 당나라의 기록을 따르지 않고 해상잡록, 성경통지 및 동삼성 지역 사람들의 전설 등에 기반해 이 내용을 재구성하게 되었다.
- 화살 독으로 인한 당 태종의 사망과 연개소문이 당 정벌
당태종이 양만춘의 화살에 눈을 잃었다는 이야기는 오랜 세월 전설로 전해져 왔다. 목은 이색의 *정관음*에서는 "이는 주머니 속의 물건이라더니, 어찌 눈이 화살에 떨어질 줄 누가 알았으랴"라고 표현했고, 노가재 김창흡의 *천산시*에는 "천 년을 지나도 대담했던 양만춘이 화살로 규염의 눈동자를 쏘아 떨어뜨렸구나"라고 적었다. 이 외에도 유사한 시들이 많이 남아 있다. 하지만 우리나라의 역사서인 *삼국사기*나 *동국통감*과 같은 문헌에는 당시 전황에 대한 내용을 당(唐)나라 기록에서 발췌해 넣었을 뿐, 이런 이야기는 찾아볼 수 없다. 이는 사대주의 성향의 사학자들이 고대 우리나라가 외국을 상대로 거둔 승리 기록들을 의도적으로 삭제했기 때문이라고 판단된다.
당나라 역사서를 살펴보면 *구당서*, *신당서*, 그리고 *자치통감* 등에서 당태종의 죽음을 두고 서로 다른 진단이 내려져 있다. 한 기록에서는 내종(內腫)으로 사망했다고 하고, 다른 기록에서는 한질(寒疾)과 이질이라고 주장한다. 결국 세계를 호령하던 만승황제의 죽음을 두고 늑막염이나 장티푸스 등으로 추측할 수밖에 없게끔 모호하게 기록한 것은 고구려인의 독화살에 맞아 숨졌다는 치욕을 감추려는 시도였다고 보인다. 그러나 그의 병이 요동 지역에서 시작되었다는 점은 모든 기록에서 일치하고 있어, 양만춘의 독화살로 인해 사망했을 가능성이 높다.
이는 송나라 태종이 태원 전투 중 입은 화살 상처로 인해 매년 독이 재발하여 결국 3년 뒤 사망했으나 송사가 이를 숨긴 것과 유사하다. 이후 신라와 당 사이의 동맹은 더욱 굳건해졌고, 안녹산과 사사명의 난 등을 포함한 당 내부의 사건들과는 당태종의 죽음이 별다른 관련이 없었음에도, 이 사실들을 가리고 왜곡하면서 역사적 기원의 맥락을 알 수 없게 만들었다는 점에서 역사 기록의 왜곡과 의도적인 편집의 위험성을 짚어볼 수 있다.
연개소문이 중국 땅을 침입한 기록은 우리 측 문헌에서 직접적으로 언급되지 않지만, 현재 북경 조양문 외곽 7리의 황량대와 산해관까지 이어진 여러 황량대라는 지명들, 그리고 산동과 직예 등에 산재한 "고려"라는 이름이 붙은 지명들이 그 흔적을 드러낸다. 전설에 따르면, 황량대는 당태종이 모래를 쌓아 양식 저장소로 위장했다가 고구려군의 습격에 대비해 복병을 배치했던 장소로 알려져 있다. 이는 연개소문이 북경까지 당태종을 추격했던 흔적이며, 산동과 직예 지역 곳곳에 고려와 관련된 지명이 남아있는 것도 연개소문이 그 일대를 점령했다는 증거로 해석된다. 특히 북경 안정문 외곽 약 60리 거리의 고려진과 하간현 북서쪽 12리 지점의 고려성이 대표적인 유적으로 꼽히며, 이는 단순한 지명이 아니라 역사적 사실을 반영한 결과물이라 할 수 있다.
당나라 사람 번한이 쓴 *고려성 회고시*에는 당시 상황이 생생히 묘사되어 있다. 그는 "외진 곳에 성문은 열려 있고, 흰 구름은 성가퀴 위에 걸렸으며, 물결은 맑고 모래는 어슴푸레 별빛 아래 놓여 있다"고 읊었다. 또한 "북소리가 구름 밖까지 퍼지고, 새로 핀 꽃들이 대지를 장식했으며, 거리가 활기가 가득하고 음악 소리가 울려 퍼졌던" 시절에 대한 기록도 담겨 있다.
당나라 사람 번한(樊漢)이 지은 고려성 회고시(高麗城懷古詩)는 다음과 같은 내용을 담고 있다.
"외딴 지역의 성문은 활짝 열려 있고, 흰 구름이 성벽에 걸려 있도다. 맑은 물이 저녁 햇빛을 머금었고, 모래는 어슴푸레 별빛을 비추네. 북소리는 구름 밖까지 울려 퍼지고, 새로 핀 꽃들이 땅을 아름답게 장식하였으리라. 그러나 문득 세상은 변하여 거리의 활기는 사라지고 더는 풍악 소리도 들리지 않네. 가시덤불과 먼지 속에 묻힌 길가엔 쑥대만 무성하고, 먼지가 비취를 덮어버리고 거친 무덤 위엔 소와 양만이 오가지 않느냐. 그때의 일을 이제 와 무어라 말할까. 쓸쓸한 가을 소리에 기러기만 길게 줄지어 날아가네."
이 시를 통해 연개소문이 한때 당나라 영토까지 진입해 침략하며 성을 쌓고 백성을 이주시켰던 장면을 떠올릴 수 있다. 북소리가 구름 밖까지 울려 퍼지고 땅은 온통 꽃으로 물들어 번화한 거리와 음악 소리가 이어졌으며, 비취와 보옥 같은 귀한 물건들이 흘러넘쳐 새로 점령한 땅의 번영을 대변했던 당시에 대한 기록으로 해석된다.
당의 역사서에 따르면, 당태종은 안시성 전투에서 패배한 뒤 거의 매년 혹은 매월 고구려를 침략했다는 기록이 있다. 이 기록들은 예를 들어 "어느 해, 어느 달에 우진달을 보내 고구려를 공격하여 어느 성을 함락시켰다"든지, "어느 해, 어느 달에 정명진을 보내 고구려를 쳐 어느 성을 무너뜨렸다"와 같은 내용으로 수없이 등장한다. 그러나 이는 당태종이 안시성 전쟁에서 눈을 부상당하고 많은 병사들이 목숨을 잃거나 부상을 입어 그의 권위와 위신이 크게 떨어졌기 때문에 이를 만회하기 위해 꾸며낸 것이었다. 실제로 고구려와의 복수전을 크게 일으키지 못하면 그는 안팎으로 비웃음의 대상이 될 수밖에 없었고, 또한 대규모 침공을 시도하다 수나라 양제의 실패를 반복할 위험도 있었다.
이에 당태종은 교묘한 전략을 세워 매달 여러 장군들에게 고구려를 침략하게 하고, "고구려의 어느 성을 점령했다"는 식의 허위 보고를 올리게 하였다. 그는 실질적인 군사적 성과가 없는 상황에서도 이를 통해 국내에 거짓된 군사적 위세를 과시하려 했다. 그의 죽음 이후에도 유언으로 요동 전쟁을 그만두도록 했는데, 이는 아들 고종에게 불필요한 부담을 지우지 않으며 동시에 백성을 아낀다는 이미지를 얻기 위한 것이었다. 그러나 실상 요동에서의 대규모 전쟁은 아예 없었으므로, "전쟁을 그만둔다"는 말 자체가 모순적이었다. 당태종의 생애는 허위로 점철되었으므로 역사학자나 독자들은 이 기록들을 면밀히 검토해야 할 필요가 있다.
한편, 연개소문은 어떻게 외침에 성공할 수 있었는가? 그 성공의 근본 배경은 두 가지로 요약할 수 있다. 발해사에서는 대문예가 "고구려가 전성기 때 강력한 병력 30만 명으로 당나라에 맞섰다"고 기록하고 있으며, 당서에서도 "고구려가 신성과 국내성에서 보병과 기병 4만 명을 동원했다", "신성과 건안 지역에는 10만 명의 군사가 있었다", "고구려와 말갈 연합군이 총 15만 명이었다"는 내용들이 나온다. 이 언급들로 미루어 볼 때, 고구려의 정규군만 해도 30만 명이 넘었으며, 그 외에도 상당한 수의 비정규 병력이 존재했음을 알 수 있다.
고려사 최영전에는 당 태종이 30만 대군으로 고구려를 침략하자, 고구려가 승군(僧軍) 3만 명을 파병해 이를 격퇴했다고 기록되어 있다. 또한, 고려 도경에는 재가화상(在家和尙)이 검은 비단으로 허리를 묶고 전쟁이 발발하면 스스로 단체를 결성해 전장에 나아갔다고 언급되어 있다. 해상잡록에서는 명림답부와 연개소문이 모두 조의 선인(皂衣仙人)의 출신임을 밝히고 있다. 이를 종합할 때, 승군은 단순한 불교 승려들이 아닌, '신수두' 단전의 조의 무사들이었으며, 연개소문은 이 조의 무사의 수장이었음을 알 수 있다. 따라서 수십만 대군의 중심인 3만 명의 조의군은 연개소문의 외정 성공의 핵심 기반이었다.
미수 허목은 백제가 "싸움을 좋아하는 나라 중 가장 뛰어나다"고 했고, 순암 안정복은 신라, 백제, 고구려 중 백제가 전쟁을 가장 선호한다고 언급했다. 이처럼 백제는 민첩하고 용맹한 전투민족으로, 고구려와 동맹을 맺어 연개소문의 외정을 지탱하는 또 다른 근거를 제공했다.
한편, 최치원은 고구려와 백제의 전성기군사가 백만 명에 달하며, 북으로 유(幽)와 계(계), 제(齊), 노(魯) 등을 소란케 하고 남으로 오(吳)와 윌(越)을 침략했다고 썼다. 이는 연개소문이 백제와 협력해 이루어낸 성과를 나타낸다. 다만, 이 글은 당나라의 한 재상에게 올린 것이었기에, 북쪽과 남쪽에서 정복했다는 표현 대신 상대적으로 온건한 춘추필법적인 표현이 사용된 것이다. 그러나 실제로 유·계, 제·노(현직 직예성과 산동성), 오·윌(현 강소성과 절강성) 등은 당시 고구려와 백제의 지배 아래 있었던 것으로 추측된다. 연개소문과 백제의 관계에 대한 구체적인 내용은 이후 자세히 다룰 예정이다.
- 연개소문의 사적(事跡)에 관한 거짓 기록들
신라 시대에는 연개소문을 백제의 원조자로 간주하면서 유교 윤리 관점에서 임금을 죽인 역신으로 비난하거나, 사대주의를 거스른 죄인으로 취급해 폄하하였다. 이러한 이유로 그의 전설이나 업적에 대한 기록을 의도적으로 없애려는 경향이 있었다. 실제로 그가 도교를 도입하고 천리장성을 축조했다는 내용조차 당나라의 기록인 *당서*에서 왜곡된 거짓 정보이며, 사실과는 거리가 멀다. 본문에서는 *삼국유사*를 통해 이를 반증하고자 한다.
삼국유사의 본문에는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다.
"당서에 따르면, 수나라 양제가 요동 정벌 당시 장수 양명이 전투 중 패배하고 죽음을 맞이하면서 맹세하기를, 꼭 고구려의 대신이 되어 그 나라를 멸망시키겠다고 하였다. 이후 조정을 독단한 개씨(盖氏)가 등장하니, 곧 양명의 말이 들어맞은 것으로 해석되었다."
또한, 고구려의 고기(古記)에는 다음과 같이 전한다. "수나라 양제가 대업 8년(612년)에 30만 대군을 이끌고 바다를 건너 공격해왔으나 실패한 후, 후퇴하며 천하의 주인으로서 작은 나라를 치다가 오히려 망신을 당했다는 탄식을 남겼다. 이에 우상 양명이 황제에게 아뢰어 자신이 죽더라도 반드시 고구려의 대신이 되어 나라를 멸망시키겠다고 복수를 다짐했다." 이 이후, 양명은 고구려에 태어나 15세 때 총명함과 용맹함으로 무양왕(榮留王)의 신임을 얻으며 신하로 등용되었다고 한다.
개금(盖金)은 스스로 고개 성을 개(盖), 이름을 금(金)이라 칭하였으며, 직위는 소문(蘇文) 즉 시중(侍中)에 해당하는 자리까지 올랐다. 그는 왕에게 남긴 주요 발언 중 하나로 "솥은 세 발이 있어야 안정되듯, 나라에도 세 가지 교(敎)가 있어야 합니다. 그러나 지금 고구려에는 유교와 불교만 있고 도교가 없어 나라가 위태롭습니다"라고 설득하였다. 이에 따라 왕은 당나라에 도교를 요청하여 도사 8명을 초빙하였고, 도관을 건립하며 도교를 장려하였다. 이는 유교와 불교의 위상을 넘는 조치였다.
또한 그는 동북과 서남 방면에 장성을 축조할 것을 요청하며, 남자는 성을 쌓고 여자는 농사를 짓도록 조직화하였고, 이 공사는 16년에 걸쳐 완성되었다. 보장왕(寶藏王) 시기에는 당 태종이 직접 군사를 이끌고 고구려를 칠 정도로 그 시대의 정세와 위상이 그려진다.
위 기록들은 연개소문의 행적과 업적이 종종 왜곡 또는 축소되었음을 보여주며, 특히 통한 외국 자료가 고구려 역사를 과장하거나 폄훼한 사례라는 분석을 가능케 한다.
양명(陽明)의 후신(後身)이 개씨(蓋氏)가 되었다는 말은 터무니없는 헛소문이며, 연개소문(淵蓋蘇文)에 대해 "성을 개(蓋), 이름을 금(金)이라 하였고, 벼슬이 소문(蘇文)에 이르렀다"고 한 기록도 불합리한 이야기로 변론의 여지가 없다. 또한, 도교를 수입했다거나 장성을 쌓기를 청했다는 등의 내용도 거짓된 기록일 뿐이다.
수나라의 양제(煬帝)는 617년에 사망했으며, 영류왕(榮留王), 즉 무양왕(武陽王)이 노자교(老子敎, 도교)를 받아들인 때는 당서에 명백히 기록된 바와 같이 당 고조(唐高祖) 무덕(武德) 7년인 624년이었다. 당시 영류왕은 겨우 열여덟 살에 불과했으니, "15살에 신하로서 당에 요청했다"는 이야기는 앞뒤가 맞지 않는다. 장성의 축조는 영류왕 재위 14년에 시작되어 16년에 완공되었는데, 이는 보장왕(寶臧王) 5년으로, 당 태종의 침략 이듬해와 일치한다. 그러나 "16년 만에 공사가 끝났고, 이후 당 태종이 친히 군대를 이끌고 공격해왔다"는 설명 역시 사실관계가 어긋난다.
영류왕은 북방 방어와 남방 공격으로 나눠 전략을 세워 당과 화친하며 신라와 백제를 견제하려 했던 인물이다. 반면 연개소문은 남쪽을 지키고 북쪽을 공격하는 정책을 주창하며, 신라를 견제하고 백제를 이용해 당을 공략하려 했다. 당 대의 황제 성씨가 이씨였고, 도교의 시조 노자 역시 성이 이씨였던 관계로 당에서는 노자를 선조로 삼아 극진히 받들었으나, 이는 신뢰할 수 없는 주장이다. 영류왕이 당과의 외교 관계를 고려해 노자의 교리를 받아들였던 것은 이해할 수 있으나, 연개소문처럼 적국인 당을 공략하려 했던 인물이 도교를 국교로 삼았다고 보기엔 무리가 있다. 한편 장성은 공격용이 아닌 방어용으로 지어졌고, 북방 방어를 중시하고 이를 목적으로 장성을 건립한 주체는 연개소문이 아니라 영류왕일 가능성이 높다. 북방 공격을 주장하며 이에 온 힘을 기울였던 연개소문이 백성과 국력을 동원해 방어용 장성을 쌓았다는 주장은 납득하기 어렵다.
따라서 연대와 논리가 맞지 않는 점을 볼 때, 도교 수입과 장성 건축에 대한 관련 기록은 모두 허구임이 확실하다.
일부에서는 삼국사기에 "연개소문이 유교, 불교, 도교 세 종교를 솥발 같다고 비유하며 그 중 하나라도 빠져서는 안 된다고 하며 왕에게 아뢰어 도교 수입을 요청했다"는 보장왕 2년 경의 기록에 근거해 이러한 일이 실제로 있었던 것으로 보아야 하지 않겠냐고 말한다. 그러나 삼국사기는 해당 내용을 고려고기(高麗古記)에서 인용했다고 밝히고 있다. 고려고기에는 "개금(蓋金)이 무양왕, 곧 영류왕에게 도교 수입을 청했다"고 되어 있기 때문에, 삼국사기의 편찬자인 김부식이 그 연대를 보장왕 2년으로 변경해 기록했음이 분명하다. 김부식은 여러 고기(古記)와 중국 사서를 자유롭게 참고하여 삼국사기를 집필했는데, 때로 정확한 연대를 검토하지 않고 원문을 임의로 수정하며 기록한 사례가 많다. 연개소문이 보장왕에게 도교 수입을 요청했다는 이야기도 그러한 오기 중 하나다.
따라서 연개소문이 도교를 들여온 일이나 장성 건설을 요청한 일은 사실일 리 없는 명백한 허위 기록이다.
그러므로 그 거짓 기록의 근본이 된 것은 《고려고기》라는 작품이다. 그렇다면 《고려고기》는 왜 이와 같은 허위 기록을 남겼을까? 《고려고기》는 대부분 신라 말기의 불교 승려가 지은 것으로 여겨지는데, 중국의 위(魏)나라 세조와 당나라 무종이 도교를 위해 불교 사찰들을 철저히 파괴하고 모든 불교 승려를 박해했던 역사적 배경이 있다. 그로 인해 당시 불교 승려들은 도교에 대한 반감을 품으며 이를 몹시 분개하게 되었다. 그리고 연개소문은 백제와 동맹을 맺어 신라를 멸망시키려 했던 인물이었기에, 신라 시대 사회에서는 연개소문을 극도로 비난하며 그의 명성을 깎아내렸다. 《고려고기》 작성자가 고기를 저술할 당시, 영류왕이 도교를 받아들였다는 점과 장성을 쌓았다는 기록을 접한 후, 도교에 대한 원망을 담아 이를 당나라 기록에 억지로 결부시키고 허황된 이야기를 덧붙였다. 이를 통해 도교를 배척하려는 목적에서 "도교를 믿으면 고구려처럼 나라가 멸망한다. 도교를 들여온 자는 연개소문이며, 그는 우리의 정신적 생명을 파괴하려 했고, 장성 축조를 통해 육체적 생명까지 위협했다"라는 식으로 도교의 위험성을 강조한 것이다. 이는 당시의 연개소문에 대한 부정적인 사회 분위기를 이용한 것이다. 그러나 이 기록은 시대적 배경과 역사적 사실이 맞지 않으므로 그 자체로 허위임이 드러난다.
우리나라에 전해지는 연개소문의 이야기는 거의 대부분이 사실과 다르게 전달된 《갓쉰동전》을 제외하면 이러한 허구적 내용뿐인 것인가? 내가 약 20년 전 서울 명동에서 노상운이라는 노인을 만났는데, 그가 다음과 같이 이야기한 바 있다. "연개소문의 자(字)는 김해였으며, 그의 병법은 고금에 뛰어났다. 그는 《김해병서》라는 병서를 저술했으며, 고려 송도 시기에도 각 방면으로 부임하는 병마절도사들에게 이 병서가 한 부씩 하사되었다. 하지만 지금은 그 병서가 완전히 사라졌다. 연개소문은 이 병법으로 당의 이정을 가르쳤고, 이정은 당나라 최고의 명장이 되었다.
이정이 저술한 《이위공병법》은 무경칠서 중 하나로 여겨지나, 원본에는 연개소문에게 병법을 배운 이야기가 자세히 기술되어 있다. 또한 연개소문을 존경하는 문구도 많이 포함되어 있었다. 그런데 당·송 시대 사람들은 외국인을 스승 삼아 병법을 배운 것이 자신들에게 치욕이라 여겨, 결국 그 병서를 없애버렸다. 현재 전해지는 《이위공병법》은 후대에 위조된 것으로, 원본과 다르다. 특히, 이 위조본에서는 연개소문을 깎아내리며 병서 첫머리에 그를 비난하는 말로 시작한다." 하지만 노인의 말에 어떤 근거가 있는지 나는 당시 역사적 지식이 부족하여 깊이 묻지 못했던 것이 아쉽다.
요양(遼陽) · 금주(金州) · 복주(復州) 등지에 연개소문의 고적과 전설이 많고, 연해주(沿海州)의 개소산(盖蘇山)에는 연개소문의 기념비가 서있어서 해삼위(海參威 : 우라디보스톡)에서 배를 타고 블라고베시첸스크로 가려면 바다 가운데서 그 산을 바라보게 된다고 하니, 후 일에 혹 그 비석을 발견하여 연개소문에 대한 기록을 변증(辨證)하고 떨어져나간 기록을 보충할 날이 있을까 한다.
- 연개소문의 사망 연도에 관한 착오 l0년
삼국사기에 기록된 연개소문의 사적이 신구당서와 자치통감을 참조하여 작성된 점은 이미 언급된 바 있다. 이들 사서에 따르면, 연개소문의 사망 연도는 당 고종 건봉 원년으로 기록되어 있으며, 이는 보장왕 25년(기원후 666년)에 해당한다. 따라서 삼국사기는 연개소문이 보장왕 25년에 사망한 것으로 기록하고 있다.
그러나 만약 연개소문이 실제로 기원후 666년, 즉 보장왕 25년에 사망했다면 이미 그의 생전에 고구려의 동맹국인 백제가 멸망하고, 고구려의 수도 평양이 당군 지휘관 소정방에 의해 포위되었을 상황이다. 그렇다면 어째서 당 태종과 이정이 그를 두려워하며 경계했으며, 나아가 서동파(소식)와 왕안석 같은 사람들이 그를 영웅으로 평가했는지 의문스럽다. 이러한 이유로 필자는 연개소문이 최소한 백제가 멸망하기 몇 년 전에 이미 세상을 떠났을 가능성을 고려하게 되었다.
이러한 가정하에 연개소문의 사망 연도를 추적해 왔으나, 이를 뒷받침할 만한 확실한 증거를 얻지 못한 상태였다. 그러던 중 최근 하남 낙양 지역에서 발견된 소위 천남생의 묘지가 중요한 단서를 제공하게 되었다. 이 묘지명에 따르면 천남생 형제 간의 다툼은 건봉 원년, 즉 기원후 666년 이전에 발생했음이 분명하다.
묘지명에는 연개소문의 사망 연도는 명시되어 있지 않지만, 천남생에 대해 중요한 기록이 포함되어 있다. 천남생은 “24세에 막리지에 임명되고 삼군대장군을 겸했으며, 32세에는 태막리지 총록군국 아형원도라는 관직을 더했다”고 적혀 있다. 또한 “의봉 4년(기원후 679년) 정월 19일 병으로 안동부 관사에서 생을 마치니 향년 46세였다”고 기록되어 있다.
이를 통해 당 고종 의봉 4년인 기원후 679년에 천남생이 46세였으므로 그의 24세 시점은 기원후 657년으로 계산된다. 이로써 천남생의 활동 및 관직 변화가 기원후 666년 이전에 이루어졌음을 알 수 있으며, 이는 연개소문의 사망 시기와 관련된 새로운 해석 가능성을 제시한다.
기원후 657년, 남생이 24세의 나이에 막리지 겸 삼군대장이 되어 병권을 잡았다는 기록은, 654년에 연개소문이 이미 사망하여 그의 직위를 남생이 계승했음을 확인시켜준다. 반면 일부는 기원후 665년, 남생이 32세에 대막리지가 되었을 때 연개소문이 사망하고 그 자리를 물려받았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그러나 삼국사기 본기와 연개소문전 모두 연개소문이 막리지가 되었다고 명시하고 있다. 또한 삼국사기의 김유신전과 천남생 묘지에서도 연개소문을 태대대로(太大對盧)로 기록하고 있다.
삼국사기 연개소문전에서는 연개소문의 아버지인 서부대인(西部大人)이 대대로로서 사망 후, 그 직위를 연개소문이 이어받았다고 전하며, 천남생 묘지에서는 증조부 자유(子遊), 조부 태조(太祚)가 모두 막리지로 임명되었음을 밝혔다. 그렇기에 막리지라는 표기가 때로는 태대대로 혹은 대대로라는 용어로 교차 기록된 사례들이 많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여기에서 대로(對盧)의 ‘대(對)’는 이두문에서 ‘마주하다’라는 뜻으로 해석되며, 막리지(莫離支)의 ‘막(莫)’ 또한 음독으로 ‘마’가 되어 동일한 발음으로 읽힌다. 결국 막리와 대로는 모두 ‘말’로 읽혔던 것이다.
고구려 말기에 이러한 관제 시스템에서 ‘말치’는 장상(將相)의 역할을 겸하며 신가(臣加)의 초기 시스템으로 유사한 기능을 했으며, 이두문으로 대로(對盧) 혹은 막리지(莫離支)라고 기록되었다. 여기에 몇 년의 재임 기간이 지나면 태대(太大)라는 경칭이 붙어 태대대로지(太大對盧之) 또는 태대막리지(太莫離支)라 불렸다. 줄여서 대막리지로 표기된 경우 역시 동일한 맥락의 생략이다.
결국 남생이 병권과 정권을 모두 장악했던 기원후 657년은 연개소문의 사망 시점이라는 추가적인 증거를 뒷받침한다. 묘지의 기록에서, 증조부 자유와 조부 태조가 막리지를 맡았고, 아버지 개금은 태대대로에 임명되었다고 구별하여 표기한 것도 이들의 직위 차이를 명확히 보여준다.
묘지 상단에는 남생의 직책을 중리위진대형(中裡位鎭大兄) 혹은 태막리지(太莫離支)라고 표기하고, 하단에는 그가 당에 항복한 이후에도 태대형(跆大兄)이라는 작위를 유지했음을 기록했다. 이는 태대형이 중리위의 진대형을 뜻하거나 태막리지를 나타낸 것으로 보이나, 다양한 표기 방식으로 인해 혼란을 초래하곤 한다. 하지만 묘지 안의 구절 “그의 증조부와 조부가 병권을 모두 쥐고 국정을 독점하였음 (乃祖乃父 良治良弓 竝執兵금 咸專國柄)”과 같이 막리지와 태대대로가 병권과 정권을 모두 맡은 고위 관직임은 분명하다.
또한 당서 고려전에서는 “대대로는 모든 국정을 총괄하였다 (大對盧 總知國事)”고 기록했다. 또 연개소문전에서도 “막리지는 당시 당나라의 중서령과 병부상서에 해당하는 직책이다 (莫離支 獪唐中書令兵部尙書職)”라고 명시함으로써, 막리지와 태대대로가 모두 장상급 관직임을 보여준다. 이는 두 직위가 단순히 호칭의 차이에 불과할 뿐 동일한 권력을 갖고 있었음을 시사한다.
기원후 657년에 연개소문이 세상을 떠난 후, 그의 장남 남생이 아버지의 직위를 계승하여 ‘말치’로 불리게 되었고, 9년 뒤 ‘신크’라는 호를 더해 ‘신크말치’라 불린 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이로 미루어 보아, 연개소문이 기원후 666년에 사망했다는 기록은 큰 오류이며, 남생이 대막리지에 오른 해를 바탕으로 기원후 665년에 연개소문이 사망했다고 보는 주장 또한 심각한 착오라고 할 수 있다. 연개소문의 사망 시점은 분명히 기원후 657년이다.
일부 사람은 신당서와 구당서 모두에서 연개소문의 사망 년도를 기원후 666년으로 기록했고, 또한 천남생의 묘지명에도 아버지 연개소문의 사망 년도가 명시되지 않은 이유에 대해 의문을 제기한다. 그러나 이는 당태종의 죽음과 연개소문이 관련된 점과 깊이 연관되어 있다. 당태종은 연개소문의 치열한 저항으로 인해 패배를 경험하였고, 고구려의 영토 일부마저 빼앗겼다. 춘추의 의에 따르면 당의 신하들은 즉각적으로 복수를 꾀했어야 마땅하지만, 실제로는 연개소문을 두려워하여 그의 생전에는 고구려를 침략하는 데 실패했으며 반대로 고구려의 압박을 받기만 했다. 이는 당나라 입장에서 크나큰 수치였으므로 이를 감추기 위해 연개소문 사망 시점을 인위적으로 10년 뒤로 미루어 기록한 것이다. 이는 역사적 사실을 왜곡하여 마치 연개소문 생전에도 당나라가 평양을 포위했고 적극적으로 저항했던 것으로 보이게 하려는 시도의 일환이었다.
이러한 경향은 다른 사례에서도 확인되듯 고대의 교통과 정보 전달의 한계, 그리고 역사적 서류 부족으로 인해 인근 국가의 주요 인물 생사 정보가 관청의 발표에 크게 의존했던 시대적 특징과 맞물린 결과다. 결국, 연개소문의 사망 해를 조작한 기록은 중국 내부에서 실록으로까지 유포되며 사실처럼 받아들여지게 되었다.
- 연개소문의 공적(功績)에 대한 간략한 평가
옛날부터 역사가들은 성공과 실패, 흥망성쇠에 따라 개인의 우열을 판가름하고, 또한 유교적 윤리관을 토대로 타인의 옳고 그름을 논해 왔다. 연개소문은 자신의 시대에 성공을 거둔 인물로 평가받았으나, 그의 무능한 아들들이 그의 업적을 지키지 못하면서 사서(史書)를 기록하는 자들로부터 배척당했다. 이에 따라 그는 흉악한 인물이라 비난받으며 불명예를 겪어야 했다. 하지만 혁명이란 무엇인가를 따져본다면, 그것은 단순히 변화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역사 속에서 진화의 의미를 가진 변화라고 할 수 있다. 역사는 어느 한 순간도 변화의 흐름 없이 지속되는 법이 없으며, 따라서 혁명이 없는 날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이를 감안할 때, 역사의 모든 변화를 혁명이라 칭하는 것은 가능하다. 그러나 역사가들은 "혁명"이라는 용어를 특별히 구분하여 사용하면서 문화적 혹은 정치적으로 뚜렷한 의미를 가진 대변혁에만 이를 적용했다. 이런 맥락에서 조선의 역사에 진정한 정치적 혁명이 몇 차례 있었는가를 살펴보면, 이를 손에 꼽을 정도라고 할 수 있다.
예컨대, 한양의 이씨가 송도의 왕씨를 대체한 사건이나, 이조 시대의 이시애와 이괄 등의 반란은 성패 여부를 떠나 단순히 정권 쟁탈에 불과했기에 내란이나 왕조 교체로 불릴 수 있을지언정, 혁명으로 보기는 어렵다. 그러나 연개소문의 경우는 이와 다르다. 그는 봉건 세습으로 이어져 오던 호족 공동정치를 타파하고 권력을 한곳에 집중시켰다. 이는 분열된 정국을 통일된 체제로 돌리는 한편, 군주나 호족을 가리지 않고 반대파를 숙청했으며, 영류왕 이하 수백 명의 고관을 죽이고 당 태종의 침략을 물리쳤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당나라에 반격을 가해 중국 전역을 떨게 만들었다. 이러한 행보는 그가 단순한 지도자가 아닌 혁명가로서 탁월한 기백과 더불어 뛰어난 재능과 지략까지 겸비했음을 보여준다.
다만, 그는 죽음에 앞서 현명한 인물을 골라 자신의 후계자로 세우고 조선인의 장기적인 행복을 도모하지 못하고 불초한 아들과 형제들에게 대권을 맡겼다. 결국 이는 그가 쌓아 올린 공적을 무너뜨리는 결과를 초래했다. 이는 그의 야심이 크고 덕망이 부족했던 인물이었음을 짐작케 한다. 그러나 문제는 그의 행적과 업적이 온전히 기록되지 않고 대부분 적국 사람들의 붓끝에서 서술된 역사 속에서 논의되고 있다는 점이다. 이러한 사료의 한계로 인해 사실의 전모를 명확히 알 수 없으니 일부 단편적인 정보만으로 그의 전체를 평가하는 것은 부당하다.
더욱이 수백 년간 외세에 굽실거리며 소극적인 자세로 역사를 기록했던 이들이 편협한 시각으로 연개소문을 가혹하게 비판하며, 충성과 임금 섬김이라는 유교적 도덕률로 그의 행위를 규탄하거나, 작은 자가 큰 자를 섬기는 것이 하늘을 두려워하는 일이라는 노예근성으로 그의 업적을 부정해 온 행태는 깊이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시대를 대표하는 인물의 흔적을 남김없이 훼손하며 폄훼한 그들의 행태에 나는 큰 분노와 아쉬움을 느낀다. 이에 따라 연개소문에 대해 몇 가지 평론을 더하며 그의 진면목을 되새길 필요가 있음을 강조하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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